[칸탈라메사 신부의 사순 특강]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과거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과거에 갇히지 말아야

4월 7일 오전 바티칸 교황궁 내 구세주의 어머니 경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을 대상으로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신부의 사순절 특강 다섯 번째 강의가 있었다. 교황청 강론 전담 사제인 칸탈라메사 신부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500주년에 관해 언급하면서 교회 전체를 위한 은총과 화해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사순절 특강 다섯 번째 강의를 “어떻게 프로테스탄트 개혁 500주년을 교회 전체를 위한 은총과 화해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라는 주제에 중점을 두면서, 로마서의 재독서는 “서양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있는 불화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교회가 존립하느냐 또는 무너지느냐를 결정할 만한 논고”로 평가 받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믿음에 기반을 둔 의화 사상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과 함께 마틴 루터의 “탑의 체험”이 “그의 모든 종교적인 계율 준수와 고행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느님과 평화 안에 머물지 못한다는 거의 절망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를 해방시켜준 말씀이 됐다.

“이러한 내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 정말 그야말로 눈사태로 변화됐던 기회가 소위 대사(indulgenza)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루터로 하여금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그 유명한 95개 조항을 붙이도록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의 역사적인 발생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의화라는 논점’이 교회와 함께 나눈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주장한 근거였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은총의 우위를 재천명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치를 기억하면서, 프란치스코회 소속이기도 한 칸탈라메사 신부는 “개혁은 관념이나 추상적인 이론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통해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그 당시에는 몸, 입,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인 행업을 중시 여겼다고 보인다.

“더 나아가, 물론 예수님께서 선행 없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친히 말씀하셨지만, ‘선행’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열거하셨던 덕목을 의미하지 않았고, 오히려 순례, 서약 초, 구일기도, 교회 헌금, 대사와 같은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새 계약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보 전진하는 것

칸탈라메사 신부는 루터 이후 “믿음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진 의화에 대한 사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질적 향상을 결과적으로 초래했지만”, 외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분수령이 됐다”고 말했다. 그 후로는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사이의 대립으로 확장됐으며,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유다교 예식주의의 계승을 대표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는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됐다”고 말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의 세 번째 길”을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히브리즘 안에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었던 참된 모체가 있다는 점이 확실히 유리한 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전망”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그 경계를 훨씬 넘어버렸기에, 예수님을 단지 히브리 예언자로 축소시키면서 “연속성을 재발견한 반면 새로움을 잃어버린” 꼴이 됐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에 관해서도 명백한 한계를 보여준다.

“믿음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진 의화에 대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고, 새로운 계약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믿으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나누는 두 가지 명령이 아닙니다. ‘회개하십시오’는 다시 말해서 ‘믿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믿으면서 회개하십시오. 새로운 나라가 도달했으므로 완전히 새로운 사상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사고방식을 바꾸십시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예컨대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것처럼, 무상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칸탈라메사 신부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히브리인들의 종교관에 대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와 우리가 다른 자료를 통해 알고 있는 특정 종교의 맥락에 대한 판단을 함께 융화시키지 못하는 방법상의 오류가 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는 온 마음을 다해 사셨던 그 삶을 통해 무엇인가 실현하려 했다”며 “그 대신에 학자들은 책과 글로 된 증거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실행한다”고 말했다.

“혹시 어떤 사람이 그 시대의 신학교에서 가르친 교리를 본다면, 혹은 단지 신심 깊은 영혼들의 매일 독서였던 준주성범(Imitazione di Cristo)만 보더라도, 숭고한 은총의 교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루터 편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을 바라본다면, 그 결과는 아주 다릅니다.”

죄에 완전히 집중된 그리스도교의 비전을 반대할 것

“사실, 겉으로는 다소 평화적인 어조를 내세우면서도 잘못과 명분을 찾으며 과거에 갇힌 채 남아 있다면, 500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은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앞을 향해 큰 도약을 해야 합니다. 마치 강이 수문에 도달하는 것처럼, 그 물길은 상급 차원으로, 더 높은 수위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로마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의 분리를 야기시키는 문제들은 무엇보다 대사(indulgenza)와 죄인이 의화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오늘날 인간의 신앙을 존립시키거나 혹은 무너뜨리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칸탈라메사 신부는 루터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는 “죄의식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얻을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며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언급도 상기시켰다. 곧, “오늘날 이 문제는 이미 반대 상황이 되었다”며 “어떻게 하면 완전히 잃어버렸던 참된 죄의식을 인간에게 되돌려줄 것인지가 관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잡한 악용을 바로잡아야 하고, “서양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죄에 집중된 암흑의 선포를 자행했고, 평신도 교육은 투쟁과 거부를 위한 것으로 치부됐다”는 식의 극단적인 표현을 잊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진 의화는 오늘날 모든 교회가 유례없이 더욱 강력하게 설파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야고보와 신약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선행’에 맞서서 반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혹은 안락함을 조장하는 즉흥적인 영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만 구원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지평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주장을 반대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신뢰할 수 있는 ‘선행’입니다. 만일 루터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 역시 오늘날 이 방식을 통해 믿음을 통한 의화를 설교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칸탈라메사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은총과 믿음 훨씬 이전에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존립하느냐 무너지느냐의 관건이 되십니다.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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